[한경에세이] 기적을 부르는 작은 결단

입력 2020-01-22 17:53   수정 2020-01-23 00:07

기적이란 상식에 어긋나는 기이한 일, 또는 신이 행한 것으로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말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기적은 주변에서 의외로 쉽게 발견된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어린 시절 말을 더듬었다. 지인 중에는 적잖이 놀라는 분도 있을 터다. 고려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과 공무원 대상 강연까지 그럭저럭 소화하니 그럴 만도 하다. 직무상 국회와 정부를 찾는 일이 많은데,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뜻을 전달하려면 막힘없는 말길은 필수다. 큰 탈 없이 감당하고 있다는 애정 어린 응원에 감사할 뿐이다.

‘크레아티오 엑스 니힐로(Creatio ex nihilo)’ 즉, 무(無)로부터의 창조는 신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경험칙과 상충하는 논증이기에 중세 이후 많은 신학자가 진땀을 흘렸다. 신성을 의심할 뜻은 추호도 없지만, 사람의 일로 바꿔보면 오히려 수월하게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단적으로 사람은 매순간 기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으로 꽉 찬 존재다.

내가 영어 단어 하나를 외우면 인류가 습득한 어휘가 하나 늘어난다. 논어를 한 줄 이해하면 유교에 대한 인류의 지식은 꼭 그만큼 깊어진다. 실없게 느껴진다면 이건 어떤가. 추위에 떠는 노숙자에게 외투를 벗어주면 인류의 선의지가 옷 한 벌만큼은 두터워진다. 미세한 변화지만 개인의 집합으로서 인류가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이전의 인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없던 존재가 창조된 셈이다. 물론 나쁜 방향으로도 똑같이 가능하니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를 덧붙여두자.

산업혁명 이후 근대의 발전은 인류의 가능성을 극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의 정신을 양분으로 근육을 불린 이성의 빛 앞에서 일체의 미신적 사고는 자리를 잃었다. 증기를 내뿜는 철마의 질주는 순식간에 지구를 휘감았고, 물질과 생명현상의 근원인 미시 세계의 신비마저 빠르게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인류세(Anthropocene)의 파국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 역시 사람에게서 말미암는다. 수많은 개인의 도전이 모여 세상을 밀고 나아간다. 작은 결단에서 시작된 삶의 변화가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인류의 의미 있는 성취를 이뤘다. 모든 사람은 언제나 인류의 잠재성만큼 귀한 존재다. 언제든 어깨 펴고 당당해도 괜찮다.

말 더듬는 버릇을 고치려고 무던히 애썼다. 지독하게 힘들었지만 약속처럼 기적은 찾아왔다. 혼자서 인류를 조금이라도 변화시켜보는 경험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한가. 바로 지금 결단하라, 크레아티오 엑스 니힐로, 기적이 문 앞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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